
역지사지(易地思之)는 '서로 자리를 바꿔보고 그것을 생각해 본다'는 뜻으로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떠넘기지 말라'는 말처럼 역지사지를 생각해야 한다.
타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능력은 흥미롭게도 '공간적 관점 바꾸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80년, 레이코프(George Lakoff)와 존슨(Mark Johnson)은 '체화 인지(embodied cognition)'라 불리는 통찰을 발표했다. 체화 인지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할 때 사용하는 사랑, 마음, 시간 등의 기본 개념들이 구체적인 신체, 공간 개념에서 출발한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이해한다(understand)'라는 말은 눈에 보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생각, 감정, 상태’ 등을 이해할 때, 실제로는 타인이 있는 장소로 자신의 의식을 이동시킨다는 뜻으로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본다'는 말이다.
수십년 전 레이코프와 존슨이 주장한 체화인지는 오늘날의 신경과학에서 그 실체가 증명되었다. 공간적 위치를 바꿀 때 활성화되는 뇌의 TPJ(Temporoparietal Junction, 측두두정접합부)'가 타인의 신념과 감정을 추론할 때도 동일하게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이 부위는 내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인식한다. 예를 들어 컴퓨터에 몰입하고 있을 때 뒤쪽에서 컵 깨지는 소리가 나면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게 된다. TPJ가 내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보다 뒤쪽에서 일어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알려주며 내 시선을 강제로 뒤쪽을 보게 된다. '시선 돌리기'는 단순한 목 근육의 이동이 아닌 주의'가 재설정되는 과정이다. 이때 작동하는 뇌와 동일한 부위가 타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려 할 때도 작동한다.
'마음 이론'과 관련된 연구에서도 TPJ의 역할은 반복해 보고되고 있다. 대표적 연구는 리베카 색스(Rebecca Saxe)와 낸시 캔위셔(Nancy Kanwisher)의 논문이다. 연구자들은 참가자에게 타인의 '잘못된 믿음'을 추론하는 이야기 과제와 단순한 물리적 상황을 이해하는 과제를 제시하고 둘의 결과를 비교했다. 참가자들이 '등장인물이 현실과 다른 믿음을 가진 상황'을 이해하려 할 때, 뇌의 오른쪽 TPJ가 선택적으로 강하게 활성화됐다. 하지만 물리적 사건을 추론하는 과제에서는 이 영역의 활성화가 크지 않았다. 이후 다양한 '기능적 자기공명 영상(fMRI)' 연구와 메타 분석에서도 유사한 결과가 확인되면서 TPJ는 타인의 마음 상태, 특히 신념을 추론하는 마음 이론의 핵심 뇌 영역으로 간주된다.
낯선 문화 경험이나 여행이 '관점 바꾸기' 능력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장소의 이동은 타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정신적 시선 돌리기'의 생리학적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여행을 통해 물리적으로 낯선 위치에 자신을 자꾸 던져 넣는 행위는 뇌의 TPJ 회로를 반복적으로 자극하는 훈련처럼 작용한다. 공간적 낯설음을 해결하기 위해 동원되는 주의 전환의 유연성이 타인의 감정과 맥락을 수용하는 심리적 유연성으로 자연스럽게 전이 되는 효과가 있다. 타인을 향한 공감의 본질은 이처럼 내 중심의 세계를 잠시 비우고, 타자가 서 있는 공간의 위치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신체화 된 유연성(Embodied flexibility)'에 맞닿아 있다.
남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어야 덜 외롭다. 내가 타인을 이해하는 만큼 나도 이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더 멀리, 더 자주 여행을 해야 하는 이유이다.
조감도: 날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새의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었을까
'베네치아 조감도(View of Venice)'라는 목판화가 있다. 가로 길이가 3m에 가까운 거대한 그림이다. 야코포 데 바르바리(Jacopo de' Barbari)가 1500년에 제작한 그림은 르네상스 시대 지도 제작술과 예술의 정점으로 평가받는다. 이런 작품을 볼 때마다 드는 의문이 있다.
"비행기도, 열기구도 없었을 때인데, 어떻게 조감도가 가능했을까?"
정확한 지도 제작을 위해 열기구를 타고 하늘에서 보는 시점을 조감도라고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베네치아 조감도는 순전히 상상의 시선일 뿐이다. 이런 종류의 시선은 고대 도시 지도에서도 나타난다. 가장 오래된 도시 조감도는 기원전 약 1500년 경에 제작된 메소포타미아 니푸르(Nippur) 점토판 지도가 있다. 도시를 위에서 내려다본 형태로, 성벽과 신전, 운하 등이 표시돼 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어떻게 도시를 표현한 것일까?
심리학자 장 피아제(Jean Piaget)는 이 의문을 밝혀내기 위해 아동들을 대상으로 한 가지 실험을 했다. 이른바 '세 산 실험(three mountains task)'이다. 공간적 관점 바꾸기의 고전으로 여겨지는 실험은 다음과 같다.
테이블에 세 개의 산 모형을 배치하고 각 산은 크기, 색상, 눈 덮인 봉우리나 작은 집, 십자가 같은 모형이 있다. 실험에 참여한 아동은 모형 주위를 돌아다니며 여러 각도에서 충분히 관찰하는 시간을 주었다. 아동이 테이블 한쪽에 앉으면, 맞은편에 인형을 배치한다. 그리고 다양한 각도에서 촬영한 사진을 보여주며, 인형의 위치에서 보이는 산의 모습을 선택하게 하였다.

실험 결과는 아동 연령에 따라 극명하게 갈렸다. 약 4~6세의 아동들은 자신이 앉아 있는 위치에서 보이는 모습을 인형의 시점으로 선택했고, 자신이 보는 것과 타인의 눈에 보이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자기중심성(egocentrism)'을 보였다. 7~9세 이상의 아동은 인형의 위치에 따라 산이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이해하고 정확하게 추론하여 올바른 사진을 선택하였다.
추상적 사고가 가능해지는 11세 이상이 되면, 산의 개수가 늘어나거나 지형이 극도로 복잡해지더라도, '좌우 반전'이나 '원근의 변화' 같은 추상적인 규칙을 적용해 공간 구조를 완벽하게 재구성할 수 있게 된다.
'자기중심성'을 극복하며 발달하는 인지적 능력은 공간 전체를 머릿속에서 재구성하는 조감도 시선의 발달과 깊이 연관돼 있다. 조감도 시선이란 대상의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가상의 시점을 통해 공간적 관계를 재구성하는 힘을 의미한다. 아동은 자신의 관점을 공간의 한 지점에 고정시키지 않는다. 대신,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공간 전체를 하나의 추상적 지도처럼 인식하며, 그 지도 위에서 자신과 인형의 위치를 마음대로 바꿔가며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실제 산 모형이 눈앞에 없어도, 산의 높낮이와 상대적 위치를 좌표값으로 처리해 'A산이 B산보다 뒤에 있고, 인형이 북쪽에서 바라본다면 산의 겹침은 이런 모양이 될 것이다'와 같은 가설-연역적 방법(Hypothetico-deductive method)을 추론하였다.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기하학적 원칙에 따라 공간을 재구조화한 것이다.
피아제의 세 산 실험으로 확인된 '관점 바꾸기' 능력의 진화는 아동이 자기중심적인 1인칭 시점을 벗어나 공간 전체를 객관적이고 통제할 수 있는 '전지적 시점', 즉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시점을 갖게 되었음을 뜻한다. 바로 이 능력이 인간 문명을 가능케 한 것이고, 이것을 '메타인지(metacognition)'라 부른다.
특별하게 고안된 개념: '메타(meta)'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너무 많은 글을 남겼다. 도서관 창고에는 수백개의 두루마리에 적힌 강의 노트와 미완성 원고가 가득했다. 기원전 1세기경, 철학자 안드로니코스(Andronicus of Rhodes)는 이 글들을 분류하고 편집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자연과 운동, 변화에 관한 글을 한 묶음으로 정리했다. 그것이 '자연학(Physics)'이다. 그런데 이렇게 묶어놓고 보니 문제가 생겼다. 자연학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글들이 남은 것이다. 실체란 무엇인가, 원인은 무엇인가와 같은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질문이었다.

안드로니코스는 이 글들을 'Physics' 뒤에 놓았다. 그리고 'ta meta ta physika'라고 기록했다. 직역하면 '자연학 뒤에 있는 것'들이다. 여기서 'meta'라는 단어는 그저 '뒤에'라는 아주 단순한 전치사이다. 그런데 책의 배열 순서를 뜻하는 이 단어가 어느 날부터 엄청난 의미가 부여되었다. '뒤에(after)'가 아니라 한 단계 위에서 바라보는 '넘어서(beyond)'라고 사람들이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학 뒤에 뭉뚱그려 모아두었던 'Metaphysics'는 더 이상 '자연학 다음에 놓인 책'이 아니라 자연 세계를 넘어 존재 자체를 묻는 학문이 됐다.
논리학에서 '메타'는 아주 희한한 모순 해결의 열쇠가 된다. 진위를 판별할 수 없는 문장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거짓이다.'
아주 난해한 문장이다. 이 문장이 참이면 거짓이 되고, 거짓이면 참이 되기 때문이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동원한 개념이 '메타'이다.
폴란드 출신의 논리학자 타르스키(Alfred Tarski)는 논리를 두 개의 층으로 나눴다. 대상언어(object language)와 메타언어(meta-language)이다.
타르스키의 주장에 따르면, '이 문장은 거짓이다'라는 문장에는 두 개의 차원이 숨겨져 있다.
'이 문장은 거짓이다'라는 문장은 참 또는 거짓이다.
앞쪽의 '이 문장은 거짓이다'는 대상언어이고, 뒤쪽의 '~라는 문장은 참 또는 거짓이다는 메타언어이다. 이 두 가지 차원이 다른 언어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면, 두 언어가 같은 층위에서 충돌해 자기 지시의 역설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논리학의 모순을 타르스키가 메타언어를 동원해 풀어냈듯이, 심리학자 플라벨(John H. Flavell)은 메타인지 개념으로 철학의 자기성찰의 모순을 풀어낸다. 인간의 인지 활동을 두 가지 층위로 구분한 것이다. '인지(cognition)'와 이 인지 활동을 조절하는 인지, 즉 '메타인지'이다.
피아제의 '세 산 실험'을 예로 들자면, 아이가 인형의 관점을 정확히 판단하려면, '내가 지금 산을 보고 있음을 알고 있다'라는 자신의 '생각에 대한 생각'이 가능해야 한다. 내가 보는 것이 유일한 실재가 아니라, 기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자신이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자기중심성'을 벗어나야 내가 보는 모습과 '인형이 보는 모습'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 생각을 상대화(=상황이나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유연하게 바라보는 태도)할 수 있어야 타인의 시선이 들어올 자리가 생긴다.
출처: 매경ECONOMY | 2026.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