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도덕을 원동력으로 하지 않는다
바닥은 술과 타액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나무 침대 삐걱대는 소리와 쾌락에 젖은 인간의 교성이 고장난 자명종처럼 밤새 울려퍼졌다. 욕망의 배설구와 같은 이곳은 '호어하우스(WhoreHouse)'라고 불리는 성 매매 업소. 세상의 모든 도덕과 윤리도 이곳에서만큼은 질끈 눈을 감아버린다.
말초적 자극이 가득한 이곳에 군복을 차려 입은 남성 여럿이 들이닥쳤다. 도덕을 다시 세우려는 자칭 '신의 군단'이다. 술에 취한 채 벌거벗은 남녀의 머리채를 잡고 사정없이 집 밖으로 끌어냈다. 곧바로 매질이 이어졌다.
거리에는 나신의 남녀가 뒤엉켰다. 교성은 어느덧 고통의 신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포주들은 참지 않았다. 윗물에서 이뤄지는 수많은 윤락행위에는 눈을 감으면서, 저잣거리에 욕망만을 통제하려는 데 대한 반발이다. 포주들은 '불쌍한 창녀들의 청원'이라는 제목의 서한을 보냈다. 수신인은 바바라 팔머, 영국 왕인 찰스 2세의 공식 정부이자, 세간에서 '왕실의 창녀'라고 부르던 여인이다.
그들은 적었다. "가장 화려하고 저명한 쾌락의 여인에게, 가난한 창녀들이 청합니다." 마치 동료에게 구호를 요청하는 듯한 메시지. 풍자적 청원이 등장한 건 왕실이 그야말로 쾌락으로 가득한 공간이어서다. 찰스 2세는 공식적인 정부만 14명을 뒀다. 궁정을 두고 '윗것들의 창녀촌'이라는 비판이 나왔던 배경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역사의 아이러니가 나타난다. 쾌락에 빠진 정치적 무심함이 역설적으로 영국이라는 나라를 봉합하는 단초가 됐다.
절대군주 대신 '절대쾌락' 꿈꿨던 찰스 2세
찰스 2세는 어려서부터 비운의 주인공이었다. 아버지 찰스 1세는 왕권신수설에 젖어 의회를 무시하고 국정을 독단적으로 운영했다. 올리버 크롬웰을 앞세운 의회군은 기어이 찰스 1세의 목을 잘라버렸다. 1649년 1월 터진 '영국 내전'이다.
이 혁명으로 찰스 2세는 20살 때부터 프랑스로 피난해 살아야 했다. 어린 그가 목도한 프랑스 궁정 문화는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화려한 옷을 입은 귀부인들과 술에 취한 귀족들. 그리고 유부녀인 귀부인과 쉽게 몸을 섞는 왕 루이 14세. 그의 마음속에 프랑스 왕실의 외설적 행동 양식이 자라고 있었다.
그의 피난 생활이 어느덧 10년 차에 접어든 1658년. 조국 영국에서 다시 격변이 일어났다. 크롬웰이 추구한 나라는 청교도를 중심으로 한 종교적 근본주의 국가였다. 춤, 연극, 축제 등 모든 향락을 금지하는 욕망을 억압하는 체제, 심지어 크리스마스 축제까지 가톨릭 축제라는 이유로 금지했다. 욕망의 압력을 느슨히 풀어주지 못하는 국가 체제는 위기를 맞는다는 걸 크롬웰은 몰랐다. 그렇게 내전 11년 만에 왕가가 복원됐다.
찰스 2세는 취임 즉시 정치 보복에 들어갔다. 크롬웰 시신을 꺼내 네 조각으로 잘라 런던 시내 곳곳에 걸었다. 일부 런던 시민은 찰스 2세가 다시 절대주의 왕징 체제를 구 축한 우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찰스 2세의 절대왕정은 딱 거기까지였다.
찰스 2세는 절대군주 대신 '절대쾌락의 왕'이었다. 날이면 날마다 여성을 갈아치웠고, 대내외적으로 인정받는 왕의 공식 정부인 '로열 미스트리스'를 열네 명이나 뒀다. 그중 한 명이 '바바라 팔머'였다. 남편을 두고서도 찰스 2세 아이를 다섯이나 낳았을 만큼 애첩 중 애첩이었다. 바바라 팔머 역시 호색한이었다. 시중을 드는 이들과도 자유롭게 잠자리를 했다. 우연히 침실을 방문한 찰스 2세에게 잠자리가 발각된 일도 있었다.
정치적 무관심(혹은 그런 척)은 그러나 영국을 부강하게 만들고 있었다. 의회 민주주의가 절대왕정을 대신해 나라를 훌륭히 이끈 덕분이다. 1665년 흑사병이라는 대역병으로 10만명이 죽어나가고, 1666년 런던대화재로 도시 80%가 불에 타버렸지만, 잉글랜드는 굳건히 버텼다.
호색의 본능을 과학·예술로 꽃피운 찰스 2세
찰스 2세는 정치에서 한발 물러난 대신, 과학과 예술의 후원자로 왕의 권위를 다시 세웠다. 프랑스 망명 시절부터 기라성 같은 과학자들을 가정교사로 삼은 덕분에, 과학의 중요성을 알고서 지적인 대가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왕실이 학문을 직접 양성하는 '왕립학회(Royal Society)'가 창립된 것도 찰스 2세 치세에서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 별의 움직임을 계산한 에드먼드 핼리, 세포를 발견해 미시 세계의 구조를 드러낸 로버트 훅이 왕립 학회 아이들이었다. 오늘날 관광지로 유명한 그리니치 천문대 역시 찰스 2세의 손때가 묻은 건물이다. 세계 시간의 표준인 '그리니치 평균시'가 여기서 나왔다.
크롬웰 시대 숨막혔던 도덕주의적 세계는 이제 붕괴되고 없었다. 찰스 2세는 시민들에게 너른 자유를 용인했다. 취한 자유, 섹스할 자유, 예술을 즐길 자유, 크롬웰 시대 도덕주의를 옹호한 시민들이 집창촌을 잇달아 습격하는 일도 벌어졌다. 그러나 시민들은 찰스 2세 통치에 만족을 표시하고 있었다. 풍속은 더럽혀지고 있었지만, 그 욕망의 배설물이 자유라는 꽃의 비료가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색한 찰스 2세가 세상을 떠났다. 왕당파와 의회파, 가톨릭과 개신교, 도덕적 엄숙주 의와 자유적 쾌락주의, 두 개로 쪼개진 세상에서 교묘한 통치로 완충제가 돼주던 군주의 죽음이었다.
동생 제임스 2세가 왕위를 넘겨 받았다. 우직한 성격으로 무엇보다 도덕적인 삶을 이상으로 여기던 인물이다. 호색한 삶을 살지도 않았고, 사적으로도 정직하고 청렴했다. 신념에 목숨을 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5년 만에 자리에서 쫓겨나야 했다.
권력을 분배할 줄 아는 정치적 역량이 없어서다. 때로는 물러날 줄 아는 유연성이 그에게는 없었다. 하체의 욕망은 과감히 뽑냈으나, 정치적 야망은 숨길 줄 알았던 찰스 2세의 유연성, 사람의 본성과 권력욕을 읽고 이를 이용할 줄 아는 통찰력, 국가라는 기계는 '도덕'을 원동력으로 하지 않는다.
출처: 매경 이코노미 202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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