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화기내과 전문의 A씨는 얼마 전 대장내시경 검사에 AI 보조 진단 도구를 도입했다. 처음엔 만족스러웠다. AI는 A씨가 놓칠뻔한 미세한 병변도 짚어냈고, 판독 속도도 눈에 띄게 빨라졌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AI없이 검사를 진행하면 예전만큼 자신이 없었다. 10년 경력이 무색하게 손이 능숙하게 움직이질 않았다. 용종을 발견하는 속도와 빈도도 이전보다 눈에 띄게 떨어졌다.
옥스퍼드대 출판부는 2024년 올해의 단어로 '뇌썩음(brain rot)'을 선정했다. 온라인 콘텐츠 과소비로 인해 정신 상태가 저하되는 현상을 뜻한다.
이 단어의 사용 빈도가 전년 대비 230% 급증했다. 자극적인 숏폼 콘텐츠 소비가 원인이었지만, AI 과의존도 '뇌 썩음'을 유발하는 원인으로 지목됐다.
AI 활용이 일상화되면서 인간의 업무 숙련도가 떨어지는 'AI 디스킬링(AI deskilling)'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AI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일반 업무 처리 능력은 물론, 인지하고 판단하는 능력과 인간관계를 맺는 사회적 능력도 퇴화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AI 디스킬링이 뭐길래
숙련도 닳아 없어지고 인지력 퇴화 디스킬링은 원래 산업사회에서 기술 변화로 노동자의 숙련도가 쓸모없어지는 현상을 설명하는 개념이었다.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능력이 조금씩 닳아 없어지는 과정이다. AI 시대에 이 개념이 다시 소환되고 있다. 비판적 사고력 침식, 의사결정 능력 저하, 분석적 추론 약화 등 AI 과의존으로 인한 인지 능력 퇴화의 증거가 쌓이고 있다. 사고·해석·글쓰기·판단 등 인간 고유의 인지 활동을 AI가 대신하면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학계에선 관련 실증 연구가 속속 보고되고 있다. MIT 미디어랩이 지난해 발표한 연구에서 참가자 54명을 세집단(챗GPT 활용, 검색엔진 활용, 도구 없음)으로 나눠 에세이 작성 실험을 진행했다. 그 결과, AI를 사용한 집단은 신경 활성도, 언어 다양성, 에세이 점수 모든 면에서 가장 낮은 성과를 보였다. AI 사용자들은 자신이 쓴 글의 내용을 정확히 인용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다. 연구팀은 이를 '인지 부채(cognitive debt)'라고 이름 붙였다.
AI를 쓰던 참가자들은 도구를 끊고 혼자 글을 써도 뇌 활성도가 회복되지 않고 여전히 둔화된 상태를 보였다. 단기적으로는 편리함을 얻지만 장기적으로는 비판적 사고, 창의성, 회복력을 키우는 신경 연결망이 약해진다는 얘기다. 스위스 SBS 비즈니스 스쿨의 마이클 거리히(Michael Gerlich) 연구에서도 AI 도구 의존도와 비판적 사고 능력 사이에 강한 상관관계가 확인됐다.
666명을 대상으로 한 이 연구에서 인지적 외주화(cognitive offloading)와 AI 사용 간 상관계수는 0.72, 인지적 외주화와 비판적 사고 간 상관계수는 -0.75로 나타났다. 특히 17~25세 젊은 층에서 AI 의존도가 높고 비판적 사고 점수가 낮았다.
한소원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뇌가 급격히 성장하는 유아·청소년의 경우 직접 경험하고 실패하며 배우는 과정이 생략되면 자율적 사고능력과 학습 동기가 동시에 떨어진다"며 "디지털 기기의 과도한 사용이 유발해온 IQ 저하 현상을 이제 AI가 '사고의 외주화'를 통해 가속화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AI 의존한 의사·개발자 역량 저하 뚜렷이 나타나
AI 디스킬링 문제는 높은 숙련도를 요 구하는 전문직에서 먼저 감지되고 있다. 의료 현장이 대표적이다. 랜싯 위장 병학 간병학(The Lancet Gastroen terology & Hepatology)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AI 보조 대장내시경 도구를 3개월 사용한 의사 19명의 독립 용종 탐지율이 AI 도입 전 평균 28.4%에서 22.4%로 떨어졌다.
모두 2000건 이상의 내시경 시행 이력을 가진 고숙련 의사들이었다. AI를 쓸 때는 더 잘 찾았지만, 혼자 판단할 때는 오히려 퇴화한 것이다. 의도적으로 오류가 심어진 AI 진단 시스템에 노출된 의사들이 AI 조언없이 진료한 동료 의사들보다 진단 추론 정확도가 유의미하게 낮아졌다는 무작위 임상시험 결과도 있다. 틀린 AI 답변도 그냥 따라가는 자동화 편향(automation bias)'이 실제로 관찰된 것이다.
IT 개발자도 상황은 비슷하다. AI 코딩 보조 도구인 '깃허브 코파일럿(GitHub Copilot)'이 생성하는 코드 비중은 전체의 46%에 달한다. 생산성과 함께 높아지는 것은 부작용 우려다.
AI 보조 도구가 자동화 편향, 자동화 유발 안일함, 인지 능력 퇴화 등 세 가지 경로로 개발자 역량을 갉아먹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더 큰 문제는 '네버스킬링(never- skilling)'이다. 디스킬링이 기존 능력의 퇴화라면, 네버스킬링은 처음부터 AI에 의존하느라 기초 역량조차 쌓지 못하는 것이다. 신입 개발자나 레지던트가 AI에 의존한 채 입사·입직하면 AI 결과물만 다듬는 수준에 머무르는 '주객전도'가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다.
판단·해석·비판적 사고는 직접 해야
AI 시대에 AI 디스킬링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일까? 전문가들은 “AI를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라고 설명한다.
MIT 연구에서 주목할 대목이 있다. 처음 AI 없이 글을 쓴 집단이 나중에 AI를 도입하자 뇌 연결성이 오히려 증가했다. 반면 처음부터 AI를 쓴 집단이 나중에 도구 없이 쓰려 하자 뇌 활성도가 회복되지 않았다.
'먼저 혼자 씨름하고 나서 AI를 도입하면 사고 탄력성이 생기지만, '처음부터 AI에 의존하면' 더 깊은 학습을 단락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핵심은 AI에 무엇을 외주화할지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반복적·기계적 업무는 AI에 맡기되, 판단·해석·비판적 사고가 필요한 영역은 의도적으로 직접 수행해야 한다는 말이다.
노르웨이, 아랍에미리트, 캐나다, 중국 등 해외에선 디지털 교과서와 학생의 AI 사용을 제한하고 있다. 지금은 기술 적용을 무작정 서두를 때가 아니다. 국가적 차원에서 이에 대한 깊은 고찰과 제도적 가이드 라인을 정립하는 것이 시급한 것으로 생각된다.
출처: 이코노미 2026-09